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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행복에 대해서 생각한 바

 

 

안녕하세요 지난 이틀 동안 "도파민"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보았습니다. 

 

 

 

오늘은 "행복"이라는 주제로 저의 미약한 성찰에 관한 글입니다. 

도파민에 대해서 글을 쓰며 예전에 한 번쯤 생각해 보던 것들을 끄집어내어

쓴 것이다 보니 저번 글과 비슷한 맥락의 단어 혹은 문장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난 글 요약을 제시합니다. 

 

(지난 글 요약)

- 노력 없이 즉각적인 보상은 우리를 도파민에 중독시킴으로써 전두엽을 파괴시킨다.

- 오랜 시간 노력을 통해 보상받을 수 있는 (중독에 진입장벽이 높은 공부, 운동 등) 은 

  우리의 신경망이 받아들이기에 적절한 도파민을 제공하며 이 과정 (=몰입) 자체도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1. 불행은 행복을 존재하게 한다. (부제: "오히려 고통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

우리가 행복하다.라고 느끼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필요할까요? 

저는 불행이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행복이 유의미해지고 가치 있다고 여겨져

우리가 이에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어둠이 있기 때문에 빛이 귀하고

빛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에요. 우리가 불행이라는 존재를 인지하고 체감하고 있기 때문에

그와 대조되는 일들에 행복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만약에 우리가 기쁘고 행복하다고 여기는

일들만 지속되고 우리가 회피하고 꺼려하는 일들이 전부 사라지게 된다면 우리는 영원히 행복할까요? 

 

제 생각에는 처음에는 드디어 내가 사는 세상이 유토피아로 도래했구나 싶겠지만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사람들의 삶의 만족도는 급격히 떨어질 것이고 오히려 디스토피아에서 자신이 살아가고 있다고 느낄 

것 같습니다. 행복한 일만 계속된다면 하루 동안 수많이 일어나는 일들 중에서 어떤 일을 행복한 일이라고

여기고 구별할 수 있을까요 그저 따분한 인생의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방금 쓰면서 또 한 가지 생각한 바는 어쩌면 이 행복들 사이에서 진짜 행복을 구별해 내기 위해서

행복 속에서 불행이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파티를

한 다음에 게임을 하고 케이크와 바비큐를 먹는 하루를 매일 반복해야 된다면 계속 먹는 음식에 질려서

첫날 즐겁던 바비큐 먹던 날이 3일 후에는 매일 가장 피하고 싶은 시간, 하기 싫은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도파민에 대해서 알고 난 이후 저에게 결정적으로 꽂힌 하나의 포인트는

"우리의 뇌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입니다. 오늘 초콜릿우유를 먹으면 

그 단맛에 아주 행복감을 느끼지만 그 행동을 내일도, 그다음 날 계속

반복하면 처음 느낀 행복감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죠. 우리 뇌는 더 단 것

혹은 새로운 맛 등 보상을 제공받기 위한 더 높은 자극을 원하게 됩니다. 

 

저번에 도파민에 관한 글을 쓸 때는 비록 도파민 중독성이 높은 멀티미디어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지만 우리의 삶 전체적으로 놓고 봤을 때 반드시 자극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노력 없이 우리가 얻는 것들이 지속되었을 때 혹은 끊임없이 

하루의 모든 부분을 행복으로 가득 채워져 더 이상 우리의 뇌가 쏟아지는 보상들에

있어서 가치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절제의 또 다른 의미는 고통과 억압이 아닌 자유

또한 우리는 고통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무조건적으로 

막 하는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본능을 억누르고 자신을 절제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절제로 인해 따라오는 고통은 오히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다이어트를 하느라 과자를 못 먹는 절제는 내가 다이어트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과자를 먹는 행위를 참아내는, 나를 통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통제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감과 보통 쓰이는 맥락 때문에 억압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레 

떠올리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기 자신을 통제한다는 것은 내가 내 몸을 가눌 

수 있으며 나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으로 오히려 억압보다 자유에 더 가깝지 않을까요 

앞서 1번에서 적은 과도한 행복은 오히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라는 맥락과 같이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을 계속 가치 있다고 여기고 누리고 싶다면 절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를 본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자유이고 행복해지기 위한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3. 유토피아는 실존하는가 

유토피아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게 된 건 중학교 1학년? 2학년? 때쯤 도덕시간입니다. 

인간의 인생의 최종 목적지는 행복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들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적인 것이라고 본다. (라고 철학자 누가 이야기 했다고 그랬는데..)

아무튼 제가 여기서 초점을 맞추고 그 당시 꽤나 오랫동안 생각했던 것은 소설 속 하나의 설정인

유토피아를 현실에서 실현시키는 것이 가능할까?입니다. 아니 사실 그 당시에는 많이 순진했기

때문에 어떻게 잘하면 되지 않을까?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정말 좋은 대통령이 뽑히면 정말 행복한 세상이 오지 않을까?라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습니다.  

 

지금 누군가 저에게 이 질문(유토피아를 현실에 실현시키는 것이 가능한가)을 똑같이 한다면

저는 절대 불가능, 소설은 소설일 뿐 그저 허구적인 내용이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단순히 몇 년 더 살아오며 어른이 되어 인생과 사회의 암울한 면을 말하려는 건 아니고요 제가 불가능할 것이다.

라고 대답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는 정말 너무나도 많고 많은 사람들이 있고 이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취향 때문입니다. 

 

만약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실현시키기 위해 절대적인 자유를 허용한다면 그 자유는 다른 사람의 

유사한 자유와 상충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길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은 사람과 길에서 노래를 듣고 싶지 않은 사람

의 자유는 서로 갈등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 누구도 어느 한쪽의 자유를 억압하고 다른 한쪽을 자유를 보장할 권리도 

근거도 없습니다. 더 극단적인 예시를 하나 더 들어보자면 사람이나 동물에게 해를 끼침으로써 행복감을 느끼는 A가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누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좋아할까요? 역시 A라는 사람과 보통 다수의 사람들의 

자유는 상충합니다. 따라서 저는 유토피아는 실현할 수 있는 허구의 존재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가 행복하기 위한 세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더라도 

엇비슷한 곳으로라도 가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는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